2004년 07월 27일
ANUBIS- Zone of the Enders

우리나라에선 Z.O.E 2nd runner 라는 북미판 제목으로 알려진 아누비스 Z.O.E는 일본에선 10만장 정도의 저조한 히트를 기록했지만 한국에서는 굉장한 반향을 일으킨 게임입니다. 뭐, 굉장한 반향이라고 해도 꼭 판매량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 한국이지만요. 일본에서 안 팔린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추측이 많지만 역시 제대로 된 마케팅 부재가 가장 큰 이유 같군요.

이 게임은 2001년 코나미가 PS2에서 발매한 Z.O.E (Zone of the Enders) 라는 게임의 속편입니다. Z.O.E는 콜로니에 살던 소심한 소년 레오가 우연히 비밀병기인 제프티에 탑승하고 그 와중에 전쟁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일들을 스토리로 진행되는 메카닉 액션 게임인데, 그때까지의 메카닉 액션 게임들에 비해 훨씬 간단한 조작과 화려한 리액션들이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나미라는 거대 브랜드에 비해 전체적으로 너무 평범한 게임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묻혀 버렸죠.
전작 Z.O.E는 전형적인 일본 메카닉 애니풍을 전적으로 답습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점이 게임의 단점으로 작용한 경향이 컸습니다. 로봇 애니메이션을 게임으로 체험하는 것까진 좋지만, 직접 조작해야 하는 액션 부분은 단조롭고 구경해야 하는 중간 데모와 스토리 부분은 너무 진부했던 거죠. Z.O.E 1편의 스토리는 퍼스트 건담을 연상시키는 초반으로 시작해서 중반에 에반게리온식 주인공으로 짜증을 팍팍 준 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로 끝이 나요.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의 컨셉 아트를 맡았던 신카와 요지씨의 독특한 메카닉 디자인들을 빼면 캐릭터고 스토리고 개성이 없다시피했지요.
하지만 Z.O.E 에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과 같은 게임의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의 가능성이요. Z.O.E는 쉬웠고 몰입하기 좋았으며 적절한 가감의 미학이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이 열매를 맺은 게 바로 이 '아누비스- Z.O.E' 입니다.

전작 Z.O.E 에선 민감하고 소심한 소년 레오가 주인공이었고, 싸워야 할 이유나 인공지능인 에이다와의 갈등 등 심리적인 드라마에 비중을 둔 면이 많았습니다. 악역들도 흉악한 듯 보이지만 나름대로 싸워야 하는 슬픈 숙명을 가진 바이올라 같은 캐릭터들이 있었구요. 이 캐릭터들을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등장시켰다면 이야깃거리도 많고 좋은 작품이 되었을 지도 모르죠. (*1) 애니메이션에선 일반적으로 대부분 드라마가 우선이고 액션을 보는 건 일부의 몇 분 정도 뿐이니까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이 아닌 게임을 만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누비스는 롤플레잉이나 어드벤처 게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드라마틱한 액션 게임을 컨셉으로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액션 게임에선 이 캐릭터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여기서 이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 변화는 어떻느냐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표 (Mission) 달성과 그 와중의 쾌감만이 있을 뿐이예요.

이런 점이 액션 게임에 있어서는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 됩니다. 게이머는 액션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고 좀 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쉬워지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짜증낼 필요도 없어집니다. 스토리는 목표와 결과만이 명확해지고, 좀 더 액션 게임에 걸맞는 형태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그 대신 파워업시킨 건 비주얼입니다. 아누비스의 그래픽과 연출력은, PS2 최고수준 게임 랭킹을 꼽으면 언제나 상위에 들어갈 정도로 굉장합니다. 색상 설정은 세련되고 차가워졌고, 이펙트는 3d느낌과 2d 느낌이 공존하는 아누비스만의 랜더링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작에선 레이저 몇 개가 나가는 느낌이었던 호밍 레이저의 수만 전작보다 10배 가까이만 늘어난 것만 봐도 비주얼적인 면에서 얼마나 발전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맨 윗사진)
하지만 단순히 화려함만 늘어난 비주얼이라기보단, 아누비스의 비주얼은 무엇이 "메카물"의 핵심인지를 파고든 비주얼입니다. 조금 안 맞는 단어인것 같기도 하지만 메카물에서 '모에(萌え)'함을 느끼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거지요. 아누비스의 제프티는 무수한 수의 레이저를 현란하게 쏠 수도 있고, 그 레이저 사이로 순간 이동해서 적을 직접 패거나 칼로 썰거나 패대기 칠 수도 있습니다. 무수한 판넬을 쏠 수도 있고 무지막지하게 큰 거포를 소환해서 한 방에 수백 마리의 적들을 몰살시키는 한 방의 미학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런 제작 방식을 좋아합니다. 게임은 소설이 아닙니다. 스토리를 먼저 만들고 그것에 게임을 맞춰 봤자 만드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지루할 뿐입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플레이할까, 그걸 생각한 제작 방식이 좀 더 게임에 맞는 스토리 메이킹이지요.
아누비스를 제작한 사람이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를 만든 코지마 히데오로 알고 있는 분도 많지만, 실제로 Z.O.E 시리즈를 만든 Z.O.E의 아버지는 무라타 슈요 씨입니다. 코지마씨에 이어 굉장히 앞날이 기대되는 크리에이터로, 코지마씨도 프로듀서 위치에 앉아 사실 아누비스에 큰 관여를 안했다는 걸 보면 무라타씨를 제 2의 코지마로 성장시키려는 건 아닐까 망상도 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스토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지만 아누비스의 스토리 비중은 그래도 다른 게임에 대해 굉장히 많은 편인데, 이 밸런스를 적절하게 잡고 게임성도 떨어지지 않게 만든 걸 보면 앞으론 무슨 작품을 만들지 기대할 수밖에요.
*1. 실제로 Z.O.E 의 악역 캐릭터인 바이올라는 Z.O.E의 OVA격인 "Z.O.E idolo" 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작품 자체가 히트를 못 쳐서 캐릭터가 묻히긴 했지만요.
# by | 2004/07/27 20:32 | Favorite - 게임 | 트랙백(2)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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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Z.O.E에 관련해서는 잘 모르지만 재미있어보이네요 'ㅁ'
이런 글을 읽으면 기뻐요 >_</
dive// 흑.. 저도 정발까지 사고 싶었는데 그때 워낙 사고 싶은 게 많아서 패스해버렸네요. ㅠ
정말 글 잘 쓰시네요...^^;; 제가 왜 아누비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그런 글입니다. (...뭔가 이상한 표현..-_-;;)
트랙백 해가겠습니다.
파판12 만세!
다 마비때문임 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이올라의 경우에는 OVA뿐만 아니라 TV판까지 출현한 Z.O.E의 개근 캐릭터더군요.(GBA용 게임까지 출현했는지는 모르겟습니다.)
TV판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서 애니원으로 방영도했고 본편과는 달리 꽤나 유쾌하고 재미있다는데 보고 싶습니다.(주인공이 중년아저씨인것과 이정구님이 성우를 맡았다는것도 플러스지만 말입니다.)
바이올라는 아마 GBA용 게임까지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발매된 ZOE 관련 굿즈에선 거의 다 등장하는 것 같더군요. 의외로 숨겨진 인기 캐릭터일지도 모르겠어요. 야심작인 아누비스가 비교적 실패한 이후로 ZOE 관련은 별로 본 적이 없는 듯한데 아쉽네요. ㅠ
TV판은 저도 제대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중년 아저씨가 주인공이란 시도는 참 신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애니원이 안 나와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