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09일
Final Fantasy XII

FF10이 나온 2001년즈음부터 이미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실제 제작기간만 해도 거의 3년짜리 게임인 FFXII는, 그 긴 개발기간에 걸맞게 굉장한 완성도를 지닌 게임입니다. 극한의 텍스처 노가다와 세밀한 배려로 별도의 로딩 없이도 거의 모든 데이터를 소화하는 그래픽은 PS2라는 한계를 고려하지 않아도 최고의 기술력과 센스를 보여 주죠. 캐릭터 디자이너 요시다 아키히코씨만의 테이스트로 가득한 그래픽 컨셉과 색상 처리도 최상급이구요. (이번 E3에서 공개된 FF13은 FF10팀이 그대로 만들고 있어선지, FF12가 개척한 새로운 질감의 3D 그래픽에서 오히려 퇴보한 듯해서 아쉽더군요.)
게임 시스템 면에서도 도전적이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가장 칭찬하고 싶은 건 역시 인카운트가 없는 전투방식을 성공적으로 3인 파티제인 파판에서 구현한 거지요. MMORPG란 기본적으로 캐릭터 1명만 조작하는 게임이 대부분이며, 만약 여러 명을 조작한다 하더라도 동료의 조작은 AI에게 맡겨지기 때문에 대략적인 지시 외에는 내리기 힘듭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같은 사냥 게임은 그정도로 충분할지도 모르지만, FF라는 시리즈는 훨씬 더 깔끔한 마법 체계와 요소간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게임이라 전투 하나하나의 밀도가 더 높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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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압도적인 하늘을 보여준 게임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
FFXII는 이런 난점을 갬빗이라는 시스템 요소와 세밀한 밸런스 조정으로 극복해냈습니다. 갬빗은 플레이어의 의지를 성공적으로 AI에 잘 녹아들게 한 아이디어라고 할 만하죠. FF10처럼 단순 공격과 단편적인 속성으로만 게임성이 부여되는 밸런스를 탈피해, 다양한 상태 이상과 질리지 않는 던전 구성으로 긴장감을 계속 느끼게 한 점도 좋았구요. 특히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적을 적절하게 끼워넣어 긴장감을 풀지 못하는 뛰어난 밸런스 조정은 FFXII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그 외에도 ATB게이지의 적절한 사용으로 공방이 깔끔해진 전투나 수많은 서브퀘스트로 끝이 보이지 않는 볼륨, 자유도있는 성장 시스템과 수집욕을 자극하는 수많은 숨겨진 무기들도 FFXII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입니다. FF7 이후로 최고의 FF라고 불릴 만하죠. 고전 RPG의 미덕을 다시 찾은 게임 스타일만 감안해도 이번 FFXII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FFXII에 대해 적어온 이런 호의적인 리뷰로 FFXII의 모든 것을 평가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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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한 게임 스타일. 뻘쭘한 이벤트씬 스타일. |
제가 FFXII를 90시간 이상 플레이하고 엔딩까지 보아가며 느낀 사실은, 이 게임은 '그래도 아직 미완성이다'입니다. 시나리오에서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고, 시스템도 그런 지적을 피해갈 수 없어요.
일단 시나리오와 연출부터 문제입니다. FFXII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이벤트씬은 필요한 대화만 표시되는 짧고 단편적인 영상이 대부분입니다. 너무 필요한 진행만 하고 넘어가는 통에 이 캐릭터의 현재 감정이나, 동료들이 서로 느끼는 유대감 등은 플레이어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죠.
시나리오의 비중을 간략하게 줄이고 게임 자체에 신경을 쓴다는 의도는 좋지만, 문제는 이런 진행이 그런 흐름을 증명할 아무런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플레이어의 상상보다 훨씬 앞질러 멀리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반 시나리오에서 반과 아셰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 아무런 동기나 복선도 없이 갑자기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다든지 하는 전개 말이죠. 평소에 서로 제대로 대화도 안 한 주제에 갑자기 반이 "나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겠어" 라니, 정말 뜬금없습니다! 물론 이 장면은 다른 많은 뜬금없는 장면들의 일부일 뿐이구요.
어떻게 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디렉터이자 시나리오를 맡은 마츠노 야스미가 파티 중심의 정통 RPG를 만든 것이 처음이었고, 이미 SRPG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적인 존재조차 이용해서 서로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드는 인간 대 인간의 구도는 상당히 마츠노씨다운 구성이예요. '나라를 위해서'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불행한 과거에 쫓기고 있을 뿐인 '주인공' 아셰와 그에 영향을 주는 '조연' 반의 관계도 타당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동안 마츠노씨가 만들어온 SRPG (예를 들면 '택틱스 오거'나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 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운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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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다지 성격은 이쁘지 않은 이쁜 왕녀 아셰님 |
마츠노씨가 그동안 만들었던 서사극식의 SRPG에서는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했고, 그 캐릭터는 각자 맡은 극의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캐릭터의 개성은 강렬하지만 단순했고,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오고가느라 한 캐릭터에게만 집중할 수 없었죠. (심지어는 주인공마저도.)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캐릭터들의 감정이 결론에 다다라도, 게이머의 상상으로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건 서사극이었고, 역사책에는 발단과 결말밖에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일본식 정통 RPG는 다릅니다. 그들은 파티를 이루고 있고, 그 동료들은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료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 그 와중에 서로 싸우기도 하고 유대감을 느끼기도 하며 공통의 목표로 접근해갑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게이머는 그들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거구요. FFXII는 그런 동료간의 유대관계에 대한 묘사가 턱없이 부족해서 도저히 어느 캐릭터에게 어느 타이밍으로 감정 이입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파티의 여캐릭터인 아셰, 프란, 판네로는 같은 여자끼리인데도 게임 내내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판네로가 프란을 걱정해주는 게 고작이랄까요. 아셰는 '나는 왕녀니까' 라는 듯이 고압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구요. 만약 아셰를 플레이어의 감정 이입 대상으로 설정해 놓았다면 좀 더 극적으로 변하는 아셰를 상세하게 묘사해서 스토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전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시스템 면에서도 모자란 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갬빗 시스템의 치명적인 단점부터가 문제예요. 갬빗은 게임의 편의성을 대폭 향상시키긴 하지만, 너무 갬빗이 게임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플레이어의 참여도는 대폭 떨어져 버려요. 중후반까지도 적당하게 느껴졌던 갬빗의 비중이 후반이 되면 너무 많아져, 플레이어가 할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후반 보스와 싸울 때는 적당히 싸우는 것 구경하면서 적당히 거들어 주기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정도죠. 갬빗 시스템도 마츠노의 SRPG적 기질이 은연중 나타난 결과라고 추측되는데, 이 자체로는 시스템적 완성도는 생길지 몰라도 정통 RPG로서 파판이 더 발전하려면 버려야 할 시스템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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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벤트씬의 연출 자체는 나무랄 데 없습니다.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
풍부한 서브퀘스트도 오히려 게임의 발목을 잡습니다. FF12는 굉장히 서브퀘스트가 많은 게임입니다. 잡아야 할 현상금 몬스터만 수십 종에 달하고, 숨겨진 이벤트도 전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구요. 그런데도 서브퀘스트를 즐기다 보면 쉽게 질립니다. 퀘스트가 "모브 의뢰 입수 -> 퇴치 -> 보수 받기"의 원패턴을 지나치게 고수하고 있어서 서브퀘스트의 버라이어티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죠. 모브 이외의 숨겨진 이벤트도 귀찮은 심부름의 연속이라 별로 나을 것이 없구요.
가장 아쉬운 점은 이 모든 것이 태생적 한계라기보단 조금만 더 신경썼어도 나아졌을 점이라는 겁니다. 스토리 부분은 조금만 더 신경썼어도 기승전결을 갖출 수 있었고, 시스템 부분도 갬빗 슬롯 숫자를 조정하거나 하는 밸런싱을 거쳐도 나아질 수 있었습니다. 서브퀘스트 부분도 조금 다양하게 만들었다면 해결될 부분이었구요.
FF10같은 경우는 원래 시스템 자체가 기존 FF의 극한을 추구하는 방식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더 발전하고 싶어도 명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FF10은 상당한 완성도의 게임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FF12는 좀더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았으면서도 그걸 극한까지 추구하지 않은 게임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유는 몰라요. 제작진이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인식하고 있었는데도 촉박한 스케줄 때문에 맞추지 못했는지도 모르죠. 모종의 이유로 게임 제작 후반에 마츠노씨가 게임에서 손을 떼고 카와즈씨에게 디렉터를 양보했는데, 그 탓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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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가 재미있고 '던전'이 즐거운 FF는 FF5 이후로 처음이었군요. |
여러 가지 단점도 늘어놓았지만, 제게 있어서 FFXII가 최고의 FF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FFXII를 하면서 감탄했던 장면이 하나둘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이런 FF를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재밌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더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E3에서 발표된 FF13의 비주얼에서, 여전히 FF의 메인스트림은 FF10으로 대표되는 시나리오 중심 FF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FF12는 앞으로도 파판의 반역자 비슷한 존재일지도 몰라요. 마츠노 야스미는 노력했을지 모르지만, 역시 대중은 이전의 파판을 더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FF12와 같은 파판이야말로 진짜 파이널 판타지가 개척해야 할 새로운 땅이자 진짜 원점 회귀의 파판이라고 생각합니다.
* reindeer.x-y.net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하나 둘씩 재업하기 시작했습니다.
# by | 2008/02/09 10:01 | Favorite - 게임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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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스탭롤에 나오는 그림을 보면서 차라리 이 게임은 한두명에만 초점을 맞추는게 더 나았을거란 생각을 했어요. 너무 거대한 시점에서 소수의 인물들만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문인지 전 끝까지 캐릭터 성격을 종 잡을 수 없더라고요. 이벤트 씬에서 저런 장면 덕택인지 정말 뜬금 없었죠. 여러모로 조금 아쉬운 게임...
FF 25 제작 발표...-_- 매번 스토리나 다르지만 FF이름 그만좀 팔았으면.
중간의 하늘에 대한 스크린샷을 보고......FSX에서도 충분히 숨막히는 하늘을
많이 봐서...그닥 동의할수 없네요.
투식스티// 스퀘어에닉스에게 FF란 브랜드가 사라지는 그 날이 아마도 일본 RPG 붕괴의 날이 아닐까 합니다. FF10이 마지막이라고 하던 때도 있었고, FF15까지 내겠다고 말을 바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말도 쏙 들어간 상태군요.
하늘에 대한 이야기는 회화적으로 아름답다는 맥락에서 한 소리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