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다와 거상



한국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어드벤처 게임이자 PS2의 히트작 중에서도 특별한 작품인 'ICO'의 디렉터 우에다 후미토씨는 다른 크리에이터와 비교하면 참 독특한 제작방식의 소유자입니다. 오사카 예술대학 유화과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한 뒤 CG실력을 연마하다가 게임업계로 뛰어든 경력 때문인지, 현재 가장 유명한 게임 크리에이터 중 한명이면서도 게임 자체에는 비교적 관심이 없는 사람이죠.

전작 ICO의 스크린샷
그가 'ICO'를 만들기 시작할 때만 해도 ICO의 컨셉은 '비디오 게임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우에다씨가 CG를 독학으로 공부할 때 만든 파일럿 무비가 ICO의 시작이었는데, 이 무비는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목가적인 장소에서 키 작은 소년이 키 큰 소녀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장면이었어요. 이 무비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손을 잡는다'라는 심상이 바로 전작 ICO의 시작점으로, 우에다씨는 이런 체험의 극대화를 ICO의 목표점으로 했습니다.

그 와중에 플레이어의 상상을 방해하는 체력 게이지나 구체적인 스토리 설정은 모두 제거되었고,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닌 '체험 소프트'라는 ICO의 정체성이 확립되었죠. 더 재밌게 만드려다 보니 '체력 게이지'와 같은 게임적인 요소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는데, 우에다 씨는 이럴 때마다 '이런 건 넣으면 안 된다'라며 자기 규제를 반복한 끝에 ICO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ICO를 플레이하면서 느끼게 되는 절제된 느낌이 바로 이런 제작 과정에서 나오게 된 산물일지도 모르죠.

PS2 게임 중에서 가장 필드가 넓은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
말을 타고 달려도 구석구석까지 가 보기 힘들 정도로 넓습니다.
PS2의 제한 속에서 이런 배경을 구현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네요.

ICO팀이 거의 3년만에 발매한 신작 '완다와 거상(巨象)'은 이런 자기 규제에서 벗어나 좀 더 내 마음대로 만들어 보자! 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게임입니다. 요르다의 존재 외에는 게임 시스템상으론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던 전작 ICO에 비하면, '완다의 거상'은 다른 게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요소를 넣는 걸 꺼리지도 않으면서 전작의 특성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의욕작이죠.

'완다와 거상'은 주인공 완다가 되어서, 숨이 끊어진 소녀를 살려내기 위해 거대한 석상 괴물인 '거상'과 싸우는 간략한 스토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스토리는 "거대한 적에 올라타 급소를 공격하는 보스전이 연달아 이어지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완다와 거상'은 ICO와 달리 보스전만 주욱 이어지는 게임이예요. 게임의 기본 설정부터가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전투 자체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필요하게 된 게임적인 요소에 힘을 아끼지 않게 된 거죠. 일단 완다와 거상은 칼을 사용해서 적의 HP를 깎는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헛점을 노리거나 조준하고 활을 쏘는 등의 기본 액션이 ICO보다 훨씬 액션 게임의 구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상은 주인공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퍼즐 덩어리고 던전입니다.

무엇보다 게임성에 큰 일조를 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거상의 공략법이예요. 이 게임에서 완다는 일반인보다는 훨씬 뛰어난 체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거상의 존재에 비하면 미력하기 그지없는 조그마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상을 쓰러트리기 위해선 거상에 올라타서 주인공의 검이 알려 주는 거상의 특별한 약점을 찔러야 하는데, 이 약점을 찾아서 올라가는 과정이 거상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전작 ICO와는 다른 독특한 퍼즐성이 탄생합니다.

예를 들어 올라타기 힘든 거상을 만났을 때는 활로 약점을 맞춰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틈을 봐서 올라탄다던가, 주위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거상을 방심하게 한 뒤 올라탄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건 간단한 퍼즐이고, 게임을 하다 보면 더 복잡한 형태의 공략법도 나옵니다.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요.)

올라탄 후에도 '변형 collision'이라고 불리는 움직이는 거대한 오브젝트를 구현한 시스템을 사용해서 실제 생명체 위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고 있습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재미라고 하면 역시 삽질 끝에 거상에 매달려 약점에 처음으로 한 방을 먹이는 순간의 쾌감인데, 이 때 몸부림치는 거상과 그 거상을 잡고 절대 놓지 않는 완다의 모습이 '스테미너 게이지' 시스템과 '변형 컬리전' 시스템 덕분에 훌륭하게 게임성으로 뒷받침되고 있네요.

L1버튼은 "거상 주시 시점" 버튼입니다.
거상과 싸울 때 거상을 중심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기능인데,
게임상에서 꼭 필요한 요소임에 동시에 거상의 박력을 한층 up시켜주는 좋은 아이디어죠.

ICO에서부터 이어진 독특한 '심상' 중심의 게임 감각도 여전합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면 넓은 필드에 주인공 혼자 외롭게 서 있는데, 주인공이 가진 칼을 높이 들면 칼에서 빛이 나오면서 주인공의 갈 길을 알려주죠. 그럼 완다는 말에 올라타 그 빛을 따라갑니다. 다리를 건너고 계곡을 넘어 드디어 거상을 발견하면 음악이 바뀌면서 어마어마한 박력과 함께 거상이 주인공을 내려다보고 공격해 옵니다. 미미한 존재인 주인공은 젖먹던 힘을 다해 거상에게 매달리고, 마침내 약점을 찾아내 들고 있던 칼로 결정타를 먹입니다. 거상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마침내 큰 소리와 함께 쓰러집니다.

이 와중에서 느낄 수 있는 '혼자 있는 고독감', '말을 타고 확 펼쳐진 초원을 달리는 풍경', '거대한 적을 만날 때의 압박감과 두려움', '공격 방법이 없는 막막함', '마침내 한 방 먹일 때의 통쾌함', '쓰러트린 후의 허탈함' 등의 심상들이 모두 완다와 거상에서는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작 ICO는 실험작은 아니었지만 선뜻 상업성을 노리고 제작하기는 힘든 게임이었습니다. 우에다씨의 가장 큰 행운이라면 이런 게임을 낼 여유가 있고 발매할 용단을 내려 준 소니에 입사했다는 사실이겠죠. 하지만 완다와 거상에서는 스탭, 퍼블리셔, 유저 모두가 인정하는 안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정말 의욕적으로 후속작을 만들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완다와 거상에서도 성공한다면 또 어떤 대단한 작품을 만들지 모르지만, 이 게임이 그리 자주 보기 힘든 역작인 것은 분명해요. 뻔한 문구지만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물론 '완다와 거상'에서도 단점은 있습니다. 조작의 불편함과 15프레임 정도까지 떨어지는 심각한 저프레임, 멀미가 나는 어지러운 카메라워크나 가끔씩 당하는 어이없는 게임오버 등이죠. 하지만 그런 단점들도 이 게임이 주는 '체험'의 묵직함과 비교한다면 가벼운 수업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애초부터 이런 것들은 이 게임에 대한 '아쉬움'이지 태생적인 단점은 아니거든요.



* reindeer.x-y.net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by Reindeer | 2008/02/09 10:14 | Favorite - 게임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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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JH at 2008/02/09 10:23
이코를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몽환과 보호본능, 완다를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막막함과
고독감은 아마 다른 게임에서 평생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곽한결 at 2008/02/25 11:34
완당와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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