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다와 거상



한국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어드벤처 게임이자 PS2의 히트작 중에서도 특별한 작품인 'ICO'의 디렉터 우에다 후미토씨는 다른 크리에이터와 비교하면 참 독특한 제작방식의 소유자입니다. 오사카 예술대학 유화과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한 뒤 CG실력을 연마하다가 게임업계로 뛰어든 경력 때문인지, 현재 가장 유명한 게임 크리에이터 중 한명이면서도 게임 자체에는 비교적 관심이 없는 사람이죠.

전작 ICO의 스크린샷
그가 'ICO'를 만들기 시작할 때만 해도 ICO의 컨셉은 '비디오 게임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우에다씨가 CG를 독학으로 공부할 때 만든 파일럿 무비가 ICO의 시작이었는데, 이 무비는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목가적인 장소에서 키 작은 소년이 키 큰 소녀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장면이었어요. 이 무비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손을 잡는다'라는 심상이 바로 전작 ICO의 시작점으로, 우에다씨는 이런 체험의 극대화를 ICO의 목표점으로 했습니다.

그 와중에 플레이어의 상상을 방해하는 체력 게이지나 구체적인 스토리 설정은 모두 제거되었고,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닌 '체험 소프트'라는 ICO의 정체성이 확립되었죠. 더 재밌게 만드려다 보니 '체력 게이지'와 같은 게임적인 요소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는데, 우에다 씨는 이럴 때마다 '이런 건 넣으면 안 된다'라며 자기 규제를 반복한 끝에 ICO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ICO를 플레이하면서 느끼게 되는 절제된 느낌이 바로 이런 제작 과정에서 나오게 된 산물일지도 모르죠.

PS2 게임 중에서 가장 필드가 넓은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
말을 타고 달려도 구석구석까지 가 보기 힘들 정도로 넓습니다.
PS2의 제한 속에서 이런 배경을 구현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네요.

ICO팀이 거의 3년만에 발매한 신작 '완다와 거상(巨象)'은 이런 자기 규제에서 벗어나 좀 더 내 마음대로 만들어 보자! 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게임입니다. 요르다의 존재 외에는 게임 시스템상으론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던 전작 ICO에 비하면, '완다의 거상'은 다른 게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요소를 넣는 걸 꺼리지도 않으면서 전작의 특성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의욕작이죠.

'완다와 거상'은 주인공 완다가 되어서, 숨이 끊어진 소녀를 살려내기 위해 거대한 석상 괴물인 '거상'과 싸우는 간략한 스토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스토리는 "거대한 적에 올라타 급소를 공격하는 보스전이 연달아 이어지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완다와 거상'은 ICO와 달리 보스전만 주욱 이어지는 게임이예요. 게임의 기본 설정부터가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전투 자체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필요하게 된 게임적인 요소에 힘을 아끼지 않게 된 거죠. 일단 완다와 거상은 칼을 사용해서 적의 HP를 깎는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헛점을 노리거나 조준하고 활을 쏘는 등의 기본 액션이 ICO보다 훨씬 액션 게임의 구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상은 주인공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퍼즐 덩어리고 던전입니다.

무엇보다 게임성에 큰 일조를 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거상의 공략법이예요. 이 게임에서 완다는 일반인보다는 훨씬 뛰어난 체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거상의 존재에 비하면 미력하기 그지없는 조그마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상을 쓰러트리기 위해선 거상에 올라타서 주인공의 검이 알려 주는 거상의 특별한 약점을 찔러야 하는데, 이 약점을 찾아서 올라가는 과정이 거상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전작 ICO와는 다른 독특한 퍼즐성이 탄생합니다.

예를 들어 올라타기 힘든 거상을 만났을 때는 활로 약점을 맞춰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틈을 봐서 올라탄다던가, 주위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거상을 방심하게 한 뒤 올라탄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건 간단한 퍼즐이고, 게임을 하다 보면 더 복잡한 형태의 공략법도 나옵니다.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요.)

올라탄 후에도 '변형 collision'이라고 불리는 움직이는 거대한 오브젝트를 구현한 시스템을 사용해서 실제 생명체 위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고 있습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재미라고 하면 역시 삽질 끝에 거상에 매달려 약점에 처음으로 한 방을 먹이는 순간의 쾌감인데, 이 때 몸부림치는 거상과 그 거상을 잡고 절대 놓지 않는 완다의 모습이 '스테미너 게이지' 시스템과 '변형 컬리전' 시스템 덕분에 훌륭하게 게임성으로 뒷받침되고 있네요.

L1버튼은 "거상 주시 시점" 버튼입니다.
거상과 싸울 때 거상을 중심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기능인데,
게임상에서 꼭 필요한 요소임에 동시에 거상의 박력을 한층 up시켜주는 좋은 아이디어죠.

ICO에서부터 이어진 독특한 '심상' 중심의 게임 감각도 여전합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면 넓은 필드에 주인공 혼자 외롭게 서 있는데, 주인공이 가진 칼을 높이 들면 칼에서 빛이 나오면서 주인공의 갈 길을 알려주죠. 그럼 완다는 말에 올라타 그 빛을 따라갑니다. 다리를 건너고 계곡을 넘어 드디어 거상을 발견하면 음악이 바뀌면서 어마어마한 박력과 함께 거상이 주인공을 내려다보고 공격해 옵니다. 미미한 존재인 주인공은 젖먹던 힘을 다해 거상에게 매달리고, 마침내 약점을 찾아내 들고 있던 칼로 결정타를 먹입니다. 거상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마침내 큰 소리와 함께 쓰러집니다.

이 와중에서 느낄 수 있는 '혼자 있는 고독감', '말을 타고 확 펼쳐진 초원을 달리는 풍경', '거대한 적을 만날 때의 압박감과 두려움', '공격 방법이 없는 막막함', '마침내 한 방 먹일 때의 통쾌함', '쓰러트린 후의 허탈함' 등의 심상들이 모두 완다와 거상에서는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작 ICO는 실험작은 아니었지만 선뜻 상업성을 노리고 제작하기는 힘든 게임이었습니다. 우에다씨의 가장 큰 행운이라면 이런 게임을 낼 여유가 있고 발매할 용단을 내려 준 소니에 입사했다는 사실이겠죠. 하지만 완다와 거상에서는 스탭, 퍼블리셔, 유저 모두가 인정하는 안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정말 의욕적으로 후속작을 만들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완다와 거상에서도 성공한다면 또 어떤 대단한 작품을 만들지 모르지만, 이 게임이 그리 자주 보기 힘든 역작인 것은 분명해요. 뻔한 문구지만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물론 '완다와 거상'에서도 단점은 있습니다. 조작의 불편함과 15프레임 정도까지 떨어지는 심각한 저프레임, 멀미가 나는 어지러운 카메라워크나 가끔씩 당하는 어이없는 게임오버 등이죠. 하지만 그런 단점들도 이 게임이 주는 '체험'의 묵직함과 비교한다면 가벼운 수업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애초부터 이런 것들은 이 게임에 대한 '아쉬움'이지 태생적인 단점은 아니거든요.



* reindeer.x-y.net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by Reindeer | 2008/02/09 10:14 | Favorite - 게임 | 트랙백 | 덧글(2)

Final Fantasy XII



FF10이 나온 2001년즈음부터 이미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실제 제작기간만 해도 거의 3년짜리 게임인 FFXII는, 그 긴 개발기간에 걸맞게 굉장한 완성도를 지닌 게임입니다. 극한의 텍스처 노가다와 세밀한 배려로 별도의 로딩 없이도 거의 모든 데이터를 소화하는 그래픽은 PS2라는 한계를 고려하지 않아도 최고의 기술력과 센스를 보여 주죠. 캐릭터 디자이너 요시다 아키히코씨만의 테이스트로 가득한 그래픽 컨셉과 색상 처리도 최상급이구요. (이번 E3에서 공개된 FF13은 FF10팀이 그대로 만들고 있어선지, FF12가 개척한 새로운 질감의 3D 그래픽에서 오히려 퇴보한 듯해서 아쉽더군요.)

게임 시스템 면에서도 도전적이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가장 칭찬하고 싶은 건 역시 인카운트가 없는 전투방식을 성공적으로 3인 파티제인 파판에서 구현한 거지요. MMORPG란 기본적으로 캐릭터 1명만 조작하는 게임이 대부분이며, 만약 여러 명을 조작한다 하더라도 동료의 조작은 AI에게 맡겨지기 때문에 대략적인 지시 외에는 내리기 힘듭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같은 사냥 게임은 그정도로 충분할지도 모르지만, FF라는 시리즈는 훨씬 더 깔끔한 마법 체계와 요소간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게임이라 전투 하나하나의 밀도가 더 높아요.

이렇게 압도적인 하늘을 보여준 게임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FFXII는 이런 난점을 갬빗이라는 시스템 요소와 세밀한 밸런스 조정으로 극복해냈습니다. 갬빗은 플레이어의 의지를 성공적으로 AI에 잘 녹아들게 한 아이디어라고 할 만하죠. FF10처럼 단순 공격과 단편적인 속성으로만 게임성이 부여되는 밸런스를 탈피해, 다양한 상태 이상과 질리지 않는 던전 구성으로 긴장감을 계속 느끼게 한 점도 좋았구요. 특히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적을 적절하게 끼워넣어 긴장감을 풀지 못하는 뛰어난 밸런스 조정은 FFXII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그 외에도 ATB게이지의 적절한 사용으로 공방이 깔끔해진 전투나 수많은 서브퀘스트로 끝이 보이지 않는 볼륨, 자유도있는 성장 시스템과 수집욕을 자극하는 수많은 숨겨진 무기들도 FFXII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입니다. FF7 이후로 최고의 FF라고 불릴 만하죠. 고전 RPG의 미덕을 다시 찾은 게임 스타일만 감안해도 이번 FFXII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FFXII에 대해 적어온 이런 호의적인 리뷰로 FFXII의 모든 것을 평가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쿨한 게임 스타일. 뻘쭘한 이벤트씬 스타일.

제가 FFXII를 90시간 이상 플레이하고 엔딩까지 보아가며 느낀 사실은, 이 게임은 '그래도 아직 미완성이다'입니다. 시나리오에서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고, 시스템도 그런 지적을 피해갈 수 없어요.

일단 시나리오와 연출부터 문제입니다. FFXII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이벤트씬은 필요한 대화만 표시되는 짧고 단편적인 영상이 대부분입니다. 너무 필요한 진행만 하고 넘어가는 통에 이 캐릭터의 현재 감정이나, 동료들이 서로 느끼는 유대감 등은 플레이어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죠.

시나리오의 비중을 간략하게 줄이고 게임 자체에 신경을 쓴다는 의도는 좋지만, 문제는 이런 진행이 그런 흐름을 증명할 아무런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플레이어의 상상보다 훨씬 앞질러 멀리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반 시나리오에서 반과 아셰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 아무런 동기나 복선도 없이 갑자기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다든지 하는 전개 말이죠. 평소에 서로 제대로 대화도 안 한 주제에 갑자기 반이 "나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겠어" 라니, 정말 뜬금없습니다! 물론 이 장면은 다른 많은 뜬금없는 장면들의 일부일 뿐이구요.

어떻게 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디렉터이자 시나리오를 맡은 마츠노 야스미가 파티 중심의 정통 RPG를 만든 것이 처음이었고, 이미 SRPG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적인 존재조차 이용해서 서로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드는 인간 대 인간의 구도는 상당히 마츠노씨다운 구성이예요. '나라를 위해서'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불행한 과거에 쫓기고 있을 뿐인 '주인공' 아셰와 그에 영향을 주는 '조연' 반의 관계도 타당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동안 마츠노씨가 만들어온 SRPG (예를 들면 '택틱스 오거'나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 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운 점이죠.

그다지 성격은 이쁘지 않은 이쁜 왕녀 아셰님

마츠노씨가 그동안 만들었던 서사극식의 SRPG에서는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했고, 그 캐릭터는 각자 맡은 극의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캐릭터의 개성은 강렬하지만 단순했고,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오고가느라 한 캐릭터에게만 집중할 수 없었죠. (심지어는 주인공마저도.)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캐릭터들의 감정이 결론에 다다라도, 게이머의 상상으로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건 서사극이었고, 역사책에는 발단과 결말밖에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일본식 정통 RPG는 다릅니다. 그들은 파티를 이루고 있고, 그 동료들은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료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 그 와중에 서로 싸우기도 하고 유대감을 느끼기도 하며 공통의 목표로 접근해갑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게이머는 그들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거구요. FFXII는 그런 동료간의 유대관계에 대한 묘사가 턱없이 부족해서 도저히 어느 캐릭터에게 어느 타이밍으로 감정 이입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파티의 여캐릭터인 아셰, 프란, 판네로는 같은 여자끼리인데도 게임 내내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판네로가 프란을 걱정해주는 게 고작이랄까요. 아셰는 '나는 왕녀니까' 라는 듯이 고압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구요. 만약 아셰를 플레이어의 감정 이입 대상으로 설정해 놓았다면 좀 더 극적으로 변하는 아셰를 상세하게 묘사해서 스토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전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시스템 면에서도 모자란 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갬빗 시스템의 치명적인 단점부터가 문제예요. 갬빗은 게임의 편의성을 대폭 향상시키긴 하지만, 너무 갬빗이 게임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플레이어의 참여도는 대폭 떨어져 버려요. 중후반까지도 적당하게 느껴졌던 갬빗의 비중이 후반이 되면 너무 많아져, 플레이어가 할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후반 보스와 싸울 때는 적당히 싸우는 것 구경하면서 적당히 거들어 주기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정도죠. 갬빗 시스템도 마츠노의 SRPG적 기질이 은연중 나타난 결과라고 추측되는데, 이 자체로는 시스템적 완성도는 생길지 몰라도 정통 RPG로서 파판이 더 발전하려면 버려야 할 시스템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벤트씬의 연출 자체는 나무랄 데 없습니다.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풍부한 서브퀘스트도 오히려 게임의 발목을 잡습니다. FF12는 굉장히 서브퀘스트가 많은 게임입니다. 잡아야 할 현상금 몬스터만 수십 종에 달하고, 숨겨진 이벤트도 전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구요. 그런데도 서브퀘스트를 즐기다 보면 쉽게 질립니다. 퀘스트가 "모브 의뢰 입수 -> 퇴치 -> 보수 받기"의 원패턴을 지나치게 고수하고 있어서 서브퀘스트의 버라이어티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죠. 모브 이외의 숨겨진 이벤트도 귀찮은 심부름의 연속이라 별로 나을 것이 없구요.

가장 아쉬운 점은 이 모든 것이 태생적 한계라기보단 조금만 더 신경썼어도 나아졌을 점이라는 겁니다. 스토리 부분은 조금만 더 신경썼어도 기승전결을 갖출 수 있었고, 시스템 부분도 갬빗 슬롯 숫자를 조정하거나 하는 밸런싱을 거쳐도 나아질 수 있었습니다. 서브퀘스트 부분도 조금 다양하게 만들었다면 해결될 부분이었구요.

FF10같은 경우는 원래 시스템 자체가 기존 FF의 극한을 추구하는 방식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더 발전하고 싶어도 명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FF10은 상당한 완성도의 게임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FF12는 좀더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았으면서도 그걸 극한까지 추구하지 않은 게임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유는 몰라요. 제작진이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인식하고 있었는데도 촉박한 스케줄 때문에 맞추지 못했는지도 모르죠. 모종의 이유로 게임 제작 후반에 마츠노씨가 게임에서 손을 떼고 카와즈씨에게 디렉터를 양보했는데, 그 탓일지도 모르겠군요.

'전투'가 재미있고 '던전'이 즐거운 FF는 FF5 이후로 처음이었군요.


여러 가지 단점도 늘어놓았지만, 제게 있어서 FFXII가 최고의 FF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FFXII를 하면서 감탄했던 장면이 하나둘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이런 FF를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재밌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더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E3에서 발표된 FF13의 비주얼에서, 여전히 FF의 메인스트림은 FF10으로 대표되는 시나리오 중심 FF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FF12는 앞으로도 파판의 반역자 비슷한 존재일지도 몰라요. 마츠노 야스미는 노력했을지 모르지만, 역시 대중은 이전의 파판을 더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FF12와 같은 파판이야말로 진짜 파이널 판타지가 개척해야 할 새로운 땅이자 진짜 원점 회귀의 파판이라고 생각합니다.



* reindeer.x-y.net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하나 둘씩 재업하기 시작했습니다.

by Reindeer | 2008/02/09 10:01 | Favorite - 게임 | 트랙백 | 덧글(3)

아이실드 21 8권

보통 스포츠 만화라고 하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 경기를 보는 듯 세밀한 묘사와 심도깊은 전개로 만화에 몰입시키는 타입과, 만화적인 묘사와 과장으로 스포츠와 캐릭터 그 자체를 즐기게 하는 타입이요. 좀 극단적인 분류긴 하지만 보통 제가 본 스포츠 만화는 이 두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다치 미츠루 작품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요.)







아이실드 21이란 만화가 어느 타입인지 얘기하자면 확실한 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극단으로 치달은 타입이죠. 이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미식축구란 스포츠를 쉽게 와닿게 하기 위해서, 미식축구란 스포츠의 구도를 굉장히 단순화시켰다는 것에 있습니다. 각 팀마다의 개성이 분명하게 살아 있고, 같은 팀 내에서도 포지션에 따라 각자 다른 캐릭터의 역할 분담이 확연하게 되어 있구요. 그런 특징에 맞추다 보니 만화는 각 인물과 팀이 가진 개성을 부각시키는 식으로 작품 방향을 맞추게 되고, 자연스레 만화적인 과장법이 자주 등장하는 형태로 스타일이 결정되어 버리게 됩니다.

저는 이 만화가 점프식 기획이 낳은 아주 기성화된 상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 만화로서 어울리는 만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개척되지 않은 돌파구를 찾다 보니, 스포츠 만화가 나오게 되었고 스포츠 만화에서도 극히 드문 편인 미식 축구 만화가 나오게 된 거지요. 미식 축구를 소년지다운 문법으로 보여주기 위해 연구하다 보니 과장된 스타일이 주가 되는 아이실드만의 표현법이 정착되게 된 거구요.

특히 데뷔작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작화력을 보여 주는 무라타 유스케의 그림을 보면 더욱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무라타 유스케의 그림은 일본 만화와 미국 만화의 데포르메 사이에서 장점만을 뽑아 상당히 훌륭한 완성도로 마무리지은 기성품 같아요. 특히 박력이 필요한 장면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구도는 만화가 지망생이 교과서로 삼아도 될 정도입니다. 주간 연재작 중에서는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데스 노트와 더불어 최고의 작화라고 생각되네요. 무서운 신인이란 말이 있지만 이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무서운 신인이 정말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그만큼 아이실드21은 공허한 구석도 많은 만화입니다. 열등생이던 주인공 세나가 필드에서 슈퍼맨이 된다든가, 평범한 불량배였던 세 명이 진짜 스포츠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든가 하는 좋은 드라마의 소재가 많은데도 드라마가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미국인의 스포츠인 미식 축구를 가져온 만화라서인지 미국 코믹스의 건조함까지 닮아 버린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쿨하게 보일 지도 모르지만 어설픈 일본 스포츠 만화식 드라마를 거기에 도입하려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애매한 드라마가 되어 버렸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이 만화를 싫어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8권도 정말 재밌게 봤고 8권을 보자마자 9권을 보고 싶어질 정도였으니까요. 아직 남겨 놓은 소재가 많아서인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흥미로운 전개를 만들어 갈지 무지 기대중입니다.

by Reindeer | 2004/10/08 11:26 | Favorite - 기타 | 트랙백 | 덧글(2)

바이오 해저드 4 체험판 클리어


으.. 바이오 해저드 4 체험판을 클리어했습니다. 체험판이라 세이브를 할 수 없어서 그런지, 몇번 반복 플레이했더니 꽤 능숙하게 진행하게 되더군요. 일단 감상은 정말 재밌게 플레이했다는 것. 잘 만들었더군요, 정말..

무엇보다 주인공 레온을 후방 시점으로 비스듬히 비추는 비하인드 카메라가 굉장합니다. 덕분에 바이오 해저드 4는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장점을 모두 가지게 되었어요. 굉장히 독특한 플레이감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이 상당히 인터랙티브해졌다는 것. 이전 바이오해저드 시리즈는 저택에서 석상을 움직여 문양을 만들거나 경찰서에서 엠블렘을 모아서 어딘가에 끼워 넣거나 하는 진행이 주가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오 해저드라는 시리즈의 스케일이 커지고 야외로 무대가 확장되면서, 그런 퍼즐 위주의 진행은 설득력이 떨어져 버려서 오히려 게임 몰입도를 방해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바이오 해저드 4는 그렇게 느긋하게 서서 퍼즐을 푸는 것 대신 임기응변을 요구합니다. 이번 적은 계단도 올라가지 못했던 이전 시리즈의 좀비들과는 달리,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도 하고, 사다리를 설치해서 2층까지 기어올라오기도 하며, 지붕에서 멀리 주인공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런 적에게 대응하기 위해서 이번 주인공은 문을 방패삼아 적의 진입을 막거나, 사다리를 밀쳐 넘어뜨려 버리거나, 적보다 먼저 지붕을 점거한 후 유리한 위치에서 적들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하구요.

> 비스듬히 비추지만 플레이 중에 불편함은 못 느꼈네요.

덕분에 바이오 해저드 4는 전편들보다 액션 게임이나 FPS의 감각에 가까운 게임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하인드 카메라 덕분에 FPS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네요. FPS의 주인공들만큼 주인공이 람보에 무대뽀도 아니고... 아마도 인터랙티브성으로는 곧 나올 하프라이프2와 비교할 수 있겠지만, 역시 너무 느낌이 달라서 결과적으론 영 다른 게임으로 보이는군요.

곧 여기저기 돌겠지만, 체험판 클리어 후 보너스로 나오는 예고 영상이 정말로 대박이군요. 한밤의 자연스런 조명과 후반부에 나왔던 고성 스테이지의 스케일이 인상깊었습니다. 완성판이 발매되면 어서 플레이해보고 싶네요.

by Reindeer | 2004/10/08 11:25 | Favorite - 게임 | 트랙백 | 덧글(3)

괴혼 - 굴려라 왕자님


점점 콘솔의 스펙이 올라가고 게임의 표현 범위가 확장되어 가는 요즘, 오히려 게임의 다양성은 줄어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곤 합니다. 나오는 것들은 죄다 속편 뿐이거나, 기존 게임의 요소에 이거저거 덧붙인 것들 뿐이라는 얘기들 말이죠. 특히 일본 쪽 게임들이 심하긴 하지만, 사실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게임이 드물어지는 정체 현상이 요즘 더 심해진 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역시 요즘의 제작자들이 지난 게임을 향유해오면서 기존 게임들의 문법을 알게 모르게 많이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요즘의 게임들은 만들기 전부터 자연스럽게 액션 게임이냐, RPG냐, 퍼즐 게임이냐, 시뮬레이션이냐 식으로 먼저 게임을 '정의'해 두고 만들기 시작합니다. 요즘은 장르간의 퓨전이 많아졌다고 해도, 결국 퓨전이란 단어부터가 장르의 벽을 넘지 못했단 반증이구요. 그런 장르의 구분은 사실 게임이 먼저 생긴 뒤 나누다 보니 생긴 건데도 말입니다. (게임이 아니라 어느 매체나 마찬가지지만요. 꼭 장르를 극복했다고 좋은 게임이 탄생하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게임과는 연이 없이 살아온 전직 조각가인 젊은 디렉터가 남코 경영진과 다른 디렉터들을 설득해가면서 만든 이 괴혼이란 게임에는, 그런 암묵적인 장르 법칙을 신경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액션 게임이기 때문에 적을 때려야 한다든가, 퍼즐 게임이기 때문에 순발력이나 공간 자격력을 시험한다든가 하는 발상 이전에, 단순히 '굴린다' 라고 하는 행위 그 자체의 즐거움에만 집중하고 있지요. 그리고 단순한 행위에 보다 복잡한 게임성을 부여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활용이 대단한 게임입니다.


하지만 '굴린다'의 재미만이 이 게임의 전부는 아닙니다. 1차적으로 유저들에게 '굴리는 게임'이란 인식을 심어주어서 쉽게 친해지게 하고는 있지만, 괴혼의 재미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확장'과 '과장'이예요. 처음에는 겨우 지우개나 책 등의 작은 소품들만 잡아먹던 덩어리가 나중에는 점점 더 큰 운동화나 라디오를 잡아먹더니, 개와 사람도 빨아들이고 결국에는 건물과 섬까지 한입에 삼켜 버리는 그 확장이 게임을 재밌게 하는 거지요. 점점 큰 걸 삼키고자 하는 본능이 사람 내면에 숨겨진 즐거움 중 하나라고 한다면, 괴혼은 그런 면에서 새로운 게임의 영역을 개척해 낸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많은 오브젝트를 PS2란 하드에서 표현하려다 보니 폴리곤수를 극도로 아낀 사각형 위주의 그래픽이 되어 버렸지만, 그런 그래픽까지 하나의 스타일로 포장해 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스타일리쉬한 게임'으로 각인시킨 디자인도 멋집니다. 괴혼이 가진 '독특한 게임'이라는 이미지는 다른 게임이라면 판매량을 깎아내릴 만한 요소가 되었겠지만, 괴혼에서는 오히려 플러스 요소가 되죠. 괴혼은 겉만 독특한 게 아니라 정말로 시작부터 독특한 게임이었으니까요.


괴혼은 정말 독특하고 의욕적인 게임입니다. 특히 게임 개발자들이 반할 만한 게임이예요. 새롭고 간략하지만 게임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훌륭하게 갖춘 매력적인 게임입니다.

하지만 장르 게임의 벽을 뛰어넘었는지 몰라도 '독특한 게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습니다. 여러 유저들이 괴혼의 독특함과 단순함에 끌려서 재밌게 즐기고 호평했지만, 괴혼을 수십 시간동안 잡으면서 플레이하는 사람은 없어요. 솔직히 3시간 이상만 잡고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픈 게임이지요. 독특하긴 하지만 단순함 이상의 깊이를 자랑하는 게임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아직 괴혼은 소품 이상의 무언가가 되기에는 부족해요. 그래도 일본에서 10만장 이상 팔리면서 의외의 대히트를 기록했다고 하던데, 덕분에 나올 예정이라는 괴혼 2에선 어떤 진화를 이루게 될지 기대하게 되네요.



*. 괴혼의 디렉터인 다카하시 케이타 씨는 일반적인 게임 음악을 싫어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더군요. 덕분에 괴혼의 OST는 정말 게임 음악 답지 않은, 보컬 위주의 컴필레이션 앨범 같은 느낌을 줍니다. 워낙 큰 손들이 앨범을 도와준 덕분에 정말 즐길 만한 음반이 되었으니 한번씩 들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

*. 이런 게임이 나올 수 있는 인프라와 분위기를 가진 일본이란 나라는 정말 생각할 수록 신기한 나라입니다.

*. 요즘 업로드가 뜸한 건 워낙 주위 환경이 변해서 그런 거 같기도.. 솔직히 이젠 정말 적을 꺼리도 거의 떨어져 가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 제 주위 가십거리를 적으려고 해도 요새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생각나는 일이 없어서 키보드에 손이 가질 않네요.. ㅠ ㅜ.ㅜㅡ,ㅠ.ㅠ.ㅠ.. . ..

by Reindeer | 2004/09/03 10:26 | Favorite - 게임 | 트랙백(2)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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